[시집]일섭3 - 토끼(08.02)



1 얼룩진 아톰 티셔츠

2 10밀리의 비

3 맘몬 신께 드리는 제사

4 사냥 

5 환자

6 물 풍선

7 하트 모양 풍선

8 한계와 사랑

9 꿈과 사랑

10 토끼

11 망각

12 몬스터

13 시간의 먹이

14 노트

15 엄마의 앨범

16 바른 길

17 한우의 눈물

18 헌혈실패

19 붉은 두뇌

20 눈사람

21 사랑을 위한 건배




1 얼룩진 아톰 티셔츠



나의 아톰 티셔츠에 얼룩이 생겼다.


그 현상에 대한 자칭 친구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 중 두 가지 가능성이 지지를 얻고 있는데

하나는 물이 빠졌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물감 같은 것이 묻었다는 주장이다

서로 다른 목소리에 치열한 공방이 오간다

심지어 말싸움을 넘어 몸싸움, 주먹다짐에 이르고 만다

그러다,

자칭 친구들은 서로 껄껄대며 악수한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하얀 연기를 뿜고는

얼룩진 아톰 티셔츠를 기어이 입어낸다.



2 10밀리의 비



기억의 조각이 부서진다

언젠가 나는 너와 함께 뜬구름을 타고 여기에 왔다.


소리가 들린다

너는 명랑한 소리라 웃음 짓지만

나는 지독한 소음으로 들린다


피부를 본다

너는 내게 여전하다고 얘기하지만

나는 내가 너무 검어졌다고 생각한다


하늘을 본다

너는 쾌청한 하늘이라고 하지만

나는 너무 탁한 하늘로만 보인다


10밀리의 비가 온다

우산이 있는 너는 비 같지도 않다며 더 오길 원하지만

우산이 없는 나는 이 비도 너무 두렵다


검은 연기가 이번엔 내게 왔다

순간, 새하얀 뜬 구름이 기억났지만

검은 나는 검은 연기가 된다.



3 맘몬 신께 드리는 제사



궁금해, 왜 우리는 이웃을 경계해야 할까?

궁금해, 왜 나는 이웃집 그녀의 경쟁자가 되었을까?

궁금해, 세상의 부는 번쩍 빌딩들을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데

궁금해, 왜 내겐 그것이 한숨 섞인 그림의 떡인 걸까?


그런데 내가 라디오를 트는 그 순간, 그것이 왜 어리석은 시간낭비라는 걸까?

그런데 내가 책을 펴는 그 순간, 그것이 왜 어리석은 시간낭비라는 걸까?

그런데 내가 시를 읊는 그 순간, 그것이 왜 어리석은 시간낭비라는 걸까?

그런데 내가 그린 그림들은 왜 쓰레기통을 찾아갈까?


올커니! 인지하기 보다는 조건 맞춤식 훈련을

올커니! 위를 쳐다보기 보다는 제시된 옷에 몸을 구겨 넣기를

올커니! 손을 들기 보다는 반짝 구두 핥기를

올커니! 소리쳐 묻기 보다는 바지 내리는 귓속말을


그렇다. 나는 대제사장의 양이다

그렇다. 나는 맘몬 신의 재물이다

그렇다. 나는 영혼을 팔아먹을 취업전선의 기사다


선하게 이웃의 목을 쳐 빌딩의 밭을 일군 공로로

선하게 이웃집 그녀의 치마를 찢어 무도회를 연 공로로

선하게 새빨간 마이크의 대가리를 쪼갠 공로로

선하게 디킨스의 책들에 똥을 갈긴 공로로


드디어 성스러운 시험을 이겨냈다

나도 구원받은 신의 자녀가 되었다.



4 사냥



심심해서 사냥을 하러 숲에 왔어요

총을 보곤 다들 도망을 가네요

도망가는 그들을 보니 어깨가 으쓱해진답니다


어이구!

멍청한 토끼 녀석이 내게로 오네요

쫑알쫑알 헛소리로 깡총대는군요

마지막 남은 총알을 눈깔에 박아주었답니다

어차피 빨간 눈에 터지니 잘 어울립니다


숲을 나오려는데

쳇!

토끼를 먹지 못한 호랑이가 옵니다

동전 몇 개 쥐어줘야겠네요

아니면 사자를 고용하는 게 나을까요?

돈 냄새를 맡았는지 힘껏 뛰어오네요


촌스럽고 천박하게

쿵.쾅.쿵.쾅.쿵.쾅.쿵.쾅!!쿠o코.ㅏ..o...



5 환자



비 내리는 밤이좋아

 

그래서

개인 하늘의 아침이 좋아

 

게다가

울기도

웃기도

하는 거야

 

그 덕에

그게 이상한거니?



6 물 풍선



날 만지지 마

네가 날 만질 땐

내 속의 것들이 다 쏟아질 거야


내게 왜 날지 못하냐고 묻지 마

그걸 대답하기엔 이미 늦은걸


내가 찢겨 진후에야

넌 알 수 있겠지


네 눈엔 보이지 않던

나의 무게를



7 하트 모양 풍선



하트 모양 풍선이 있어

그 풍선이 점점 커져 터져버리면

차라리 좋으련만

대다수의 하트 모양 풍선은

보기 싫게 서서히 쪼그라든다.



8 한계와 사랑



아무리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한계가 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지치게 된다

아무리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도 한계가 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지치게 된다

아무리 좋아하는 영화를 봐도 한계가 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지치게 된다

아무리 좋아하는 운동을 해도 한계가 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지치게 된다

아무리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해도 한계가 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지치게 된다


사랑도 그런 걸까?


그래서 다른 책을 찾고

그래서 다른 음악을 찾고

그래서 다른 영화를 찾고

그래서 다른 운동을 찾고

그래서 다른 친구를 찾고


사랑도 그런 걸까?



9 꿈과 사랑



유치원을 다닐 때 내 꿈은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었다만

초등학교를 다닐 때 내 꿈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만

중학교를 다닐 때 내 꿈은 사업가가 되는 것이었다만

고등학교를 다닐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만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이 되니 어디든 취직하는 게 꿈이 되었다


사랑도 그런 걸까?



10 토끼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돌아오는 길에 토끼 한 마리를 샀다

귀가 큰 이 아이는 내 이야길 잘 들어 줄 것이다


싫은 걸까?

토끼는 자꾸만 귀를 접으려 든다

토끼는 자꾸만 고개를 숙이며 존다


당근을 들었다.

토끼는 충혈 된 눈으로 몽둥이를 쳐다본다

토끼는 복슬복슬 털로 고슴도치처럼 군다


놓아준다.

토끼는 깡충깡충 서커스다

토끼는 엉금엉금 임금이다


달에 있는 건 이 아이가 아니라 오히려 나였다.



11 망각



두뇌에 벌레가 들어갔어

계속 갉아먹어서 이제 조금밖엔 남질 않았어


그래서 생각해

참 다행이라고.



12 몬스터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나는 오늘도 위대한 작품들을 본다

그렇게 오늘이 쌓이다보면 비슷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멀어지고 있다


네 안의 몬스터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며 먹어치우지만

이런 내겐 결핍만이 유일한 연필이다

나의 연필은 몬스터를 그릴 수 있을까?

몬스터는 기어이 밖으로 나올까?


선뜻 연필에 씌운 우산을 버리지 못하는 내게

네 안의 몬스터는 비웃는 눈물을 건넨다.



13 시간의 먹이



하루24시간

도대체 뭐가 그렇게 바쁜 걸까?

항상 부족하기만 한 시간


어쩔 수 없이 부족한 시간을 벌기 위해

우리는 매일 매일의 나이를

시간의 먹이로 던져준다


그리곤 스스로 늙어간다.



14 노트



왜 이 공간에 줄을 그은 거야

왜 스스로 자신을 제한하는 건데

넌 스스로 글자들을 쫓아내

공간을 무능하게 만드는 구나


줄을 넘어!

원래부터 그어져 있던 줄이란 건 없어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그 줄도

사실은 네가 그었던 거잖아


마지막 남은 세상까지 그렇게 죽이지마

노트는,

유일하게 남겨진 너만의 세상이니깐.




15 엄마의 앨범



엄마가 앨범을 내곤

내게 와 첫 번째 싱글을 들려주었어

괜찮다 했고 차트 성적도 괜찮았지.


엄마가 두 번째 싱글을 내게 들려주었어

그 곡은 별로라 했고 엄마는 실망했지

두 번째 싱글은 차트 진입에 실패했어.


지금 엄마는 세 번째 싱글을 찾으러 바다로 들어가

첫 번째 싱글보다 더 깊고

두 번째 싱글보다 더 큰,

소음 가득한 파도가 있는 곳으로


그리고 나는 또……

울어.




16 바른 길



도서관에 왔다

책을 펼쳤다

엄마 생각이 났다


아냐, 아들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그래


책을 보니 당연스레 잠이 온다

난 공부체질이 아닌가봐

엄마 생각이 났다


아냐, 아들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그래


잠을 깨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와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며 별 없는 하늘을 보니 멜로디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기타가 없다

엄마 생각이 났다


아냐, 아들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그래


다시 책상에 앉았다

책을 펼쳤다

엄마 생각이 났다


아냐, 아들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그래


책을 보니 안타깝게 잠이 온다

난 공부체질이 아닌가봐

엄마 생각이 났다


아냐, 아들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그래


잠을 깨기 위해 세수를 했다

세수를 하고 초췌한 거울을 보니 새로운 멜로디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기타가 없다

엄마 생각이 났다


아냐, 아들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그래


학원을 가기 위해 도서관을 나왔다

나도 치선이 형처럼 효자란 것이 되고 싶은데

나는 왜 이럴까?

아무래도 공부체질이 아닌가 보다

엄마 생각이 났다


아냐, 아들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그래


엄마의 한숨소리가 내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17 한우의 눈물



갑자기 척추가 아팠다

엄마는 깜작 놀라 서너 병원을 데려갔지만

꾀병인 것 같습니다

라는 불확실한 대답에 나를 방치해버렸다


그런데 진짜 병의 원인은 다름 아닌 한우였다

그 날은 내가 어르신들과 소갈비를 먹은 날이었고

척추는 그날부터 아팠다

한우가 꿈에 나타나 나를 쳐다보며 가르쳐 주었다


한우는 그랬다

남들은 그렇더라도 너는 그러지 말아야했다고

같은 눈동자를 가진 너는 그래서 척추에서 눈물이 난다고


소들이 물 건너오기 시작하여

한우들은 다소 안도했지만

광우병과 담을 쌓는 사람들은

여전히 한우를 찾는다


그렇다.

알고 보면 광우병은 서민들이 앓는 병인데.




18 헌혈실패



피가 지나치게 순수

자칫 영화 티켓에 홍당무

순수는 우스운 야옹이다


피 위에 둥둥, 캡슐에 갇힌 토끼

놀란 눈 새까매

쫑긋 귀 말아버릴